후지와라노 시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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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시메코는 1131년 후지와라노 코레미치의 딸로 태어나, 1148년 비후쿠몬인의 양녀가 되었다. 고노에 천황을 섬기며 뇨고가 되었고, 후지와라노 마사루코와의 입궁 경쟁 끝에 황후(중궁)가 되었다. 이후 상상 임신을 겪고 고노에 천황 사후 출가했다. 호겐의 난 이후 황후, 황태후를 거쳐 1168년 쿠죠인의 칭호를 받았으며, 1176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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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시메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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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지와라노 테이시 |
일본어 표기 | 藤原呈子 |
로마자 표기 | Fujiwara no Teishi/Shimeko |
다른 이름 | 후지와라노 시메코 |
신분 | |
직위 | 제76대 천황의 황후 (중궁) 제76대 천황의 황후 (황후궁) 황태후 쿠죠인 (九条院) |
재위 기간 | 규안 6년 음력 6월 22일 - 호겐 원년 음력 10월 27일 (1150년 7월 18일 - 1156년 12월 11일) 호겐 원년 음력 10월 27일 - 호겐 3년 음력 2월 3일 (1156년 12월 11일 - 1158년 3월 5일) 호겐 3년 음력 2월 3일 - 닌난 3년 음력 3월 14일 (1158년 3월 5일 - 1168년 4월 30일) 닌난 3년 음력 3월 14일 - 안겐 2년 음력 9월 9일 (1168년 4월 30일 - 1176년 10월 23일) |
여원호 | 쿠죠인 (九条院) |
여원호 선하 | 닌안 3년 음력 3월 14일 (1168년 4월 30일) |
생애 | |
출생 | 덴쇼 원년 (1131년) |
사망 | 안겐 2년 음력 9월 9일 (1176년 10월 23일) |
법명 | 세이죠칸 (静浄観) |
가문 | |
친가 | 후지와라 씨 (북가 나카미카도 류) |
양가 | 후지와라 씨 (북가 미도 류)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코레미치 |
양아버지 |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어머니 | 후지와라노 타츠코 (후지와라노 아키타카의 딸) |
양어머니 | 후지와라노 토쿠시/나리코 (비후쿠몬인) |
배우자 | 고노에 천황 |
혼인 | |
입궁 | 규안 6년 음력 4월 21일 (1150년 5월 19일) |
결혼 | 알 수 없음 |
자녀 | 없음 |
양자녀 | 없음 |
궁중 생활 | |
여어 선하 | 규안 6년 음력 4월 28일 (1150년 5월 26일) |
준후 | 알 수 없음 |
신위 | 알 수 없음 |
황거 | 알 수 없음 |
궁정 수뇌 인물 | 알 수 없음 |
궁정 여방 | 알 수 없음 |
지위 | 알 수 없음 |
입후 전 위계 | 종3위 |
역직 | 알 수 없음 |
친서 | 알 수 없음 |
2. 생애
코레미치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아키타카의 딸이다. 11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코레미치가 비후쿠몬인의 사촌 형제였던 관계로, 1148년에 비후쿠몬인의 양녀(유자)가 되었다.[1] 요리나가는 마사히토 친왕에게 시집간다는 풍문을 듣기도 했다.
1150년 정월, 고노에 천황이 원복하면서 마사루코가 입내하여 뇨고가 되었지만, 2월에 시메코도 타다미치의 양녀로 입내하게 되었다. 이는 마사루코에 대항해 입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다미치는 법황에게 "섭관 이외의 사람의 딸은 입후할 수 없다"라고 진언했다.[1]
요리나가는 아버지 타다자네에게 도움을 청했고, 타다자네는 법황에게 미치나가의 딸 죠토몬인과 비집정자의 딸 (모로스케의 딸 안시/야스코, 모로자네의 양녀 켄시/카타이코)이 입후한 예를 제시하며, 요리나가에게는 비후쿠몬인에게 편지를 보내 탄원할 것을 명령했다.
시메코가 종3위에 오르고 입내가 임박하자, 요리나가는 "만일 시메코가 마사루코보다 먼저 입후한다면, 자신은 세력이 약해질 것이다"라고 말했고, 타다자네도 끈질기게 법황에게 입후를 주청했다. 그 결과, 3월 14일, 마사루코는 황후가 되었다. 마사루코의 뒤를 이어, 4월 21일 시메코도 입내하고, 6월 22일에 중궁이 되었다.[1]
닌페이 2년 (1152년) 10월, 비후쿠몬인은 시메코의 회임 착대를 주관하고, 12월에는 시메코가 산실로 나가면서 등신불 5구를 조성해 순산을 기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예정일이 지나도 출산 소식이 없었고, 승려들의 연일 기도에도 효과가 없자 9월에 회임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어 기도가 중단되었다. 12월, 시메코는 산실에서 다이리로 돌아왔다. 이는 주변의 기대에 따른 상상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호겐 원년 (1156년) 10월, 긴시/요시코가 중궁이 되자, 황후로 옮겼고,[1] 호겐 3년 (1158년) 2월, 무네코/토시가 황후가 되자 황태후로 옮겼다.[1] 닌난 3년 (1168년) 3월 14일, 고시라카와 상황은 타이라노 시게코/지시코를 황태후로 세우기 위해, 시메코에게 구조인(九条院)의 여원호를 내렸다.[1] 이 원호 선하에 대해, 구조 가네자네는 시메코가 아버지 타다미치의 양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모가 아님을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2] 안겐 2년 (1176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1]
2. 1. 출생과 입궁
코레미치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아키타카의 딸이다. 1131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코레미치가 비후쿠몬인의 사촌 형제였던 관계로, 1148년에 비후쿠몬인의 양녀(유자)가 되었다.[1] 요리나가는 마사히토 친왕에게 시집간다는 풍문을 듣기도 했다.1150년 정월, 고노에 천황이 원복하면서 마사루코가 입내하여 뇨고가 되었지만, 2월에 시메코도 타다미치의 양녀로 입내하게 되었다. 이는 마사루코에 대항해 입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다미치는 법황에게 "섭관 이외의 사람의 딸은 입후할 수 없다"라고 진언했다.[1]
요리나가는 아버지 타다자네에게 도움을 청했고, 타다자네는 법황에게 미치나가의 딸 죠토몬인과 비집정자의 딸 (모로스케의 딸 안시/야스코, 모로자네의 양녀 켄시/카타이코)이 입후한 예를 제시하며, 요리나가에게는 비후쿠몬인에게 편지를 보내 탄원할 것을 명령했다.[1]
시메코가 종3위에 오르고 입내가 임박하자, 요리나가는 "만일 시메코가 마사루코보다 먼저 입후한다면, 자신은 세력이 약해질 것이다"라고 말했고, 타다자네도 끈질기게 법황에게 입후를 주청했다. 그 결과, 3월 14일, 마사루코는 황후가 되었다. 마사루코의 뒤를 이어, 4월 21일 시메코도 입내하고, 6월 22일에 중궁이 되었다.[1]
2. 2. 황후 책봉과 권력 투쟁
규안 6년 (1150년) 2월, 테이시/시메코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양녀 자격으로 고노에 천황에게 입내하였다. 타다미치는 법황에게 "섭관 이외의 사람의 딸은 입후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1] 이는 친아들 모토자네에게 섭관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비후쿠몬인과 연계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이에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타다자네는 법황에게 죠토몬인 등 비집정자 출신 황후의 예를 들며 비후쿠몬인에게 탄원할 것을 요리나가에게 명령했다. 요리나가는 비후쿠몬인을 얕잡아 보았으나, 타다자네는 "이미 국모이다"라며 설득했다.
테이시/시메코가 종3위에 오르고 입내가 임박하자,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마사루코보다 먼저 황후가 되면 자신의 세력이 약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타다자네의 끈질긴 주청으로, 1150년 3월 14일, 마사루코가 황후가 되었다. 4월 21일, 테이시/시메코도 입내하여, 6월 22일에 중궁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9월, 타다자네는 타다미치의 재산과 지위를 빼앗아 요리나가에게 주고 의절했다. 타다미치는 딸 세이시/키요코를 통해 마사루코를 견제했다.
2. 3. 상상임신과 고노에 천황의 죽음
규주 2년 (1155년) 7월, 고노에 천황은 자식 없이 붕어하였다. 다음 달, 후지와라노 시메코는 출가하였다. 이듬해 호겐 원년 (1156년) 창포절(5월 5일), 시메코는 코카몬인과 함께 애상가를 나누며 고노에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마카가미).[1]닌페이 2년 (1152년) 10월, 비후쿠몬인은 시메코의 회임 착대를 주관하고, 12월에는 시메코가 산실로 나가면서 등신불 5구를 조성해 순산을 기원했다 (병범기 10월 19일조, 12월 22일조). 그러나 이듬해 3월 예정일이 지나도 출산 소식이 없었고, 승려들의 연일 기도에도 효과가 없자 9월에 회임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어 기도가 중단되었다 (병범기 7월 30일조, 9월 14일조). 12월, 시메코는 산실에서 다이리로 돌아왔다 (병범기 12월 17일조). 이는 주변의 기대에 따른 상상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2. 4. 출가 이후
규주 2년 (1155년) 7월, 고노에 천황이 자식 없이 붕어하자, 테이시/시메코는 출가하였다.[1] 이듬해 호겐 원년 (1156년) 창포절(5월 5일), 테이시/시메코는 코카몬인과 함께 애상가를 나누며 고노에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마카가미』)[1]호겐 원년 (1156년) 10월, 후지와라노 긴시/요시코가 중궁이 되자, 황후로 옮겼고,[1] 호겐 3년 (1158년) 2월, 토우시/무네코 내친왕이 황후가 되자 황태후로 옮겼다.[1] 닌난 3년 (1168년) 3월 14일, 고시라카와 상황은 타이라노 시게코/지시코를 황태후로 세우기 위해, 테이시/시메코에게 구조인(九条院)의 여원호를 내렸다.[1] 이 원호 선하에 대해, 구조 가네자네는 테이시/시메코가 아버지 타다미치의 양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모가 아님을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2] 안겐 2년 (1176년), 4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1] 『이마카가미』에 의하면, "외모도, 분위기도,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3. 가계
후지와라노 데이시(藤原呈子)는 1131년 후지와라노 고레미치(藤原伊通)와 후지와라노 아키타카(藤原顕隆)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간파쿠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의 양녀가 되었다. 근대 이전 시대의 많은 일본 귀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름의 정확한 표기는 불확실하며, '테이시'와 '시메코'는 각각 추측성 온요미와 훈요미 표기이다.
참조
[1]
서적
台記
불명
[2]
서적
玉葉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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